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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연

계획 없음의 매력 본문

기록/기록하는 여행

계획 없음의 매력

보라연 2021. 11. 4. 16:50

2015년 8월 초,

말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자그레브에 5일을 묵었다.

자그레브에 이미 다녀갔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반문했다. 대체 3시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은 애매하게 시간이 남으면 '그냥 한번 가볼까?'하고 잠깐 거쳐가는 그 도시에 대체 어떤 이유로 그렇게나 오래 묵었는지.

 


평소의 난 계획적인 사람에 속한다. 매일 밤 자기 전, 혹은 일어나서 오늘은 어떤 일정이 있는지, 그 일정 사이 사이에는 뭘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하곤 그 생각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여행은 최대한 계획 없이 다니고 싶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이런 내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지만, 평소 계획없이 사는 게 좋다는 친구가 여행만 가면 새벽부터 일어나 계획적으로 명소를 찍고다니는게 좋다고 말하는 걸 보니, 여행은 일상에게 하는 반항이 아닐까.

 

그러니 자그레브에 무려 5일 씩이나 묵었던건 사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였다. 오히려 부끄럽게도 '몰라서' 그랬던 것이었다. 반항은 하고 싶은데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유럽이라는 땅을 생애 처음 밟게 될 나였지만, 이리저리 많이 찾아보고 계획을 짜면 그 계획에 잡혀다닐 것 같아 단호히 '계획 없음'을 선언하는 오기를 부렸다. 최대한 계획을 짜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와중에 여자 혼자 가기에 극성수기에 숙소 예약 조차 안하면 큰일이 날 것 같다는 두려움은 또 있었다. 그렇게 섣불리 했던 결정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었다. 3시간이면 다 보는 도시에 4박 5일이라니.

 

하지만 아무 계획 없이 갔던,
어쩌면 멍청해 보일 수도 있는 긴 머무름 속에서,
자그레브는 나에게 계획 없음의 매력을 알려주었다.


 누워서 1시간 넘게 낮잠을 잤던 어느 잔디밭

 

커피와 마카롱만 있으면 3시간이 넘는 수다를 떨었다

 


 

첫 날부터 자그레브는 내게 파란만장한 여행을 선물해주었다.

 

비행기도 아니고 예약했던 숙소가 오버부킹이 된 것이었다. 나만큼 숙소 주인 분들도 당황하셔서 미안한 마음에  다른 숙소에까지 직접 연락해주셨고, 나에게 맛있는 커피와 저녁까지 대접하셨다. 거기에 자그레브까지 오게 된 본인들의 인생 얘기와 직접 경험한 자그레브 얘기, 간단한 투어까지. 우연한 오버부킹 덕분에 내가 더 미안함이 느껴질만큼 많은 것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찾아간 새로운 숙소는 신기하게도 한국인이 운영하는 호스텔이여서 당시 묵었던 사람들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자그레브의 특성 상 극성수기임에도 여행객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첫날 밤부터 호스텔에 묵는 여행객들과 사장님, 총 5명이 모여 와인과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관광'을 위한 다른 여행지들과는 조금 느낌이 다른 곳이어서 그런지, 자그레브의 그 호스텔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특이하고 색다른 사연 혹은 방식을 가진 여행객들이었다. 오토바이 세계일주를 하는 사람, 한복을 입고 무전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 자동차로 캠핑 여행을 하는 사람 등... 그보다 사실 자그레브라는 도시에서 영어도 잘 하지 못하는데 호스텔을 하고 있는 사장님마저 너무나 기구한 (하지만 멋있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렇게 새벽 늦게까지 얘기는 계속되었다. 그 다음날 떠나겠다는 사람을 붙잡아 하루 더 묵게 하곤, 사장님을 포함한 우리는 오후 1시까지 늦잠을 자곤 늦은 점심을 먹고 함께 마트로 가서 장을 보고 호스텔에서 맛있는 저녁을 만들어 술과 함께 또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약속이라도 한 듯 한명 씩 모두 자그레브를 떠났다.

모두가 왠만한 우연이 아니고선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저 자그레브에서만의 추억으로 남겨두려는 듯 아무도 연락처를 묻지도, 물어보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이런 얘기를 들으면 굳이 자그레브가 아니어도, 우리나라의 어디에서든 할 수 있는 일을 무려 유럽에서까지 해야 했냐는 물음을 할 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끼리도 '엠티 온거 같애~'라며 그 사실을 인정했다. 여기가 자그레브인지, 대한민국의 어떤 도시인지 모르겠다고.

 

물론 대한민국의 어디에서든 그와 비슷한 여행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한국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던 것도, 3시간짜리 도시 자그레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만약 자그레브에서 3시간이면 관광이 끝나는 도시에 4박이나 잡았다는 이유로 자책 가득한 마음이였거나 아님 아예 예약을 바꿨었다면 호스텔에서의 사람들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크로아티아가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뀐지 얼마 안되었다는 것도, 이제 자본주의가 퍼지는 과정이라 이런저런 문제가 많다는 것도, 웨이터 학교가 따로 있다는 것도, 음식점에서 그렇게 상상 이상으로 웨이터가 오기까지 오래 걸린다는 것도, 하지만 웨이터를 직접 부르면 짜증을 내서 오기까지 무조건 기다려야한다는 것도, 자그레브는 세금을 많이 내야해서 비싸다는 것도, 자그레브의 건물들은 흑벽이라는 것도, 사장님께서 사주신 맛있는 맥주와 피자도... 그 모든 것을 모른채 그냥 볼거 없는 도시라는 낙인만 찍고 지나치는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2015.08.03
- 자그레브를 떠나며...

 

사람마다 삶의 방식이 다른 만큼,
여행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틀리지 않았다.

자그레브 전까지의 난, 여행까지와서 스팟을 찍고 다니는 바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그레브레에서 느꼈던 건 그 누구도 자신과 다른 여행스타일을 무시하거나 이상하게 치부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자그레브에서 5일이나 묵는 다는 평범하지 않은 일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금이라도 바꾸라는 말을 한 마디씩 던졌었다. 하지만 난 그 '계획 없음'을 믿었고, 왠지 그 말들에게도 반항하고 싶어, 그대로 강행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계획 없음'의 매력에 더더욱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그레브에서 어디에서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하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은 여행을 하며 스팟을 찍으며 바쁘게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을 여행이 아닌 관광이라고 치부해버리고 어쩌면 무시 아닌 무시를 했던 내 속마음이 부끄러워져 버렸다.

 

그냥 다른 사람, 다른 취향, 다른 스타일일 뿐. 평범한 연애가 없듯, 평범한 사람이 없듯, 평범한 여행도 없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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