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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연

반년 전, 어느 공항 본문

기록/기록하는 여행

반년 전, 어느 공항

보라연 2021. 11. 4. 16:49

2015년 8월

프라하 공항.

 

프라하 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서 1박 후 한국으로 귀국. 2달 동안의 유럽 여행이 끝나기 직전인 날이였다. 아직 하루라는 시간이 남았지만 여행이 당장이라도 끝날 것 같은 기분이 들던 날이었다.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코젤을 비우고 남은 시간을 때우던 그 때 정말 갑자기 비가 쏟아져내렸다. 왠지 모르게 우울해졌지만 그 생각을 지우려고 애써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처럼 곧 비가 그쳤다. 하지만 비행기 시간은 5시 55분. 아직 1시간이나 남았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 밖을 보았을 땐, 어느새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밖엔 어둡고 노란색 가로등까지 듬성듬성 켜진 비오는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그야말로 범죄영화의 첫 장면 같았다.

 

 

이윽고 비행기는 출발했고 창가자리에 앉았지만 이번 여행을 하면서 나름 비행기에 익숙해졌답시고 창 밖을 보기보다는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책에서는 러스킨이라는 사람이 말한 ‘데셍’, 그리고 ‘글그림’의 엄청난 위력을 설명하고 있었다. 여행을 다니며 감동을 주는 장소에 앉아 무작정 데셍을 그리기엔 나의 손이 내 눈이 담는 만큼 그려내지 못하니, 글로 그림을 그려보라는 말이였다. 글 또한 그림만큼, 혹은 그 이상의 감동을 담을 수 있다고. 대신 데셍을 그릴 때처럼 요목조목 뜯어보고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그러니 데셍이나 글그림을 그리면 ‘그냥 좋아’가 아닌 왜 좋은지, 왜 감동을 받았는지, 왜 이걸 그리고 싶은건지, 어떤 부분을 가장 강조하고 싶은지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고. 그리고 그 물음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그러다 눈이 부셔 밖을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어둡고 칙칙하던 풍경은 어느새 어딘가 다른 세계로 가는 상상 속의 길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하얀색 그 자체로 변했고, 비행기가 그 길을 뚫고 올라가자 정말 거짓말처럼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고작 5분, 10분 전의 바깥 풍경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깨끗하고 맑은 하늘이 눈 앞에 보였다. 말 그대로 파란 하늘과 그리스 로마 신전에서 신들이 타고 다닐 법한 하얀 뭉게구름, 그리고 그 아래의 넓고 얇은 구름과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땅의 풍경. 비행기를 여러번 탔지만 이렇게 창 밖의 풍경이 감동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그 평범한 하늘을 무심코, 하지만 계속해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건 눈이 부셔서였던 걸까 아님 그 순간을 나의 글그림으로 그리고 싶어서 였을까. 아마도 서너번의 비행동안 어쩌면 지나쳐왔을 비슷한 풍경이 다르게 보인 건 ‘why?’라는 질문을 던지며 나만의 글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무언가에 홀리듯 계속 바라보던 창밖에는 비슷하지만 결코 비슷하지 않은 풍경이 연속되었고, 그러다 해가 서쪽으로 살짝 기울어지면서 구름 사이로 오렌지색과 노란색이 섞인 듯한 햇빛이 비쳤다. 해와 가까워질 수록 햇노란색에 가까운 모습이였다.

 

책이란 것 하나로 이렇게 하늘이 다채롭고 이뻐보일 수 있는게 참 아이러니하다. 내가 무심코 지나갔던 장면들 중에서 놓쳐버린 세세한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저 그림을 못그리는 나 자신을 탔하거나 카메라 렌즈로 그 감정을 담으려 시도했을 뿐, 왜 글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 놓쳐버린 감정들이 안타까워졌다.

 


 

그는 자연 속의 어떤 장면들은 우리와 함께 평생 지속되며, 그 장면이 우리의 의식을 찾아올 때마다 현재의 어려움과 반대되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 속의 이러한 경험을 ‘시간의 점(spot)’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때는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세운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

 

 

여행 초반, 처음 읽었을 때에도 나에게 울림을 줬던 구절이였다.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땐, 무려 '해방감'을 주고 '재생의 힘'이 있으려면 '시간의 점'이라는 하나의 장면 혹은 상황이 무조건 대단하고 충격적이여야만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건 여행이 끝날 무렵이였다. 시간의 점이란, 인생에서 정말 충격적이고 대단한 순간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몇 번이나 지나쳤던 평범한 장면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프라하 공항에서부터 비행기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던 그 장면, 그 장면을 보면서 느낀 나의 감정들, 그 장면을 특별하게 만든 나의 물음들, 그리고 그것을 오롯이 기록으로 남긴 이 글.

 

결국 이 모든 것이 내 마음 속에 담은 첫 '시간의 점'이지 않을까.

 

너무나도 평범한 공항과 하늘 위의 경험.

하지만 그 평범한 하늘은 나의 첫 ‘시간의 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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